[개드립] 고려대와 연세대, 그 상징의 기원을 찾아. (2) 망상공간

[개드립] 고려대와 연세대, 그 상징의 기원을 찾아. (1)


세상만사가 삽질을 열심히 하고 나면 바로 근처에서 더 간편하고 손쉬운 해결책이 발견된다는 머피의 법칙은 진리인 것 같다. 필자가 장장 4시간에 걸친 뻘글을 싸지르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잠시 쉬었다 돌아오니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 60년 가을, 연고전 준비로 온 캠퍼스가 떠들석하던 때에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채희철 동문이 우리신문사 편집실을 찾아와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박희도 동문(62년 철학과 마침)에게 우리대학교의 상징으로 내세울 만한 것을 물었다. 순간 박동문이 생각한 것이 독수리였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 그리고 예민한 시력으로 지상의 동물들을 포식하는 독수리는 호랑이가 이길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독수리가 결정돼 독수리 깃발을 만들게 됐다. 그러나 ‘우리대학교는 나무가 울창하므로 사자가 어울린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 시간에 밀려서 그 해만 독수리 깃발을 쓰고 다음해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연고전이 열리던 날 석간신문에 연고전 기사와 함께 독수리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이때부터 독수리는 우리대학교의 상징이 됐다.(후략)

연세춘추 1999년 11월 29일자 기사.(출처)

이 글에 의한다면 연세대가 독수리를 상징으로 내새운 것은 1960년부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앞선 글에서 유추해보았던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의 기간에도 부합되며 더하여 컨텍스트 상 중요 행위자, 즉 총학생회와 연세춘추 편집국장이 모두 포함되는 이야기가 된다. 즉, 1편에서 다뤄보았던 엔하위키의 텍스트도 과장이 섞였을 뿐 그 서사구조와 중요 인물에서는 정확히 이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그... 그래... 아마 당시 연세춘추 편집실에 소주 몇 병이 굴러다니긴 했을거야...)

이로서 필자는 뭔가 마무리가 뒤죽박죽이 되긴 했지만 나름대로 임무를 완료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끼며 이만 글을 마쳐야 하겠다. 아 이로서 정말로 공부해야하잖아! 다른 뻘짓거리를 찾아보자!

[개드립] 고려대와 연세대, 그 상징의 기원을 찾아. (1) 망상공간

 과연 고려대의 상징인 호랑이와 신촌 Y모 대학의 상징인 독수리의 기원은 무엇인가? 필자가 이 점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진 것은, 2012년 4월 25일 새벽, 아침 9시에 예정된 교양과목 중간고사를 준비하던 중 잠시 들렀던 모 야구팀의 팬 커뮤니티에서 뻘글을 싸지르면서부터였다. 필자가 응원하는 모 야구팀은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날인 4월 24일,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모 팀과의 사이에서 "경기 중 병맛폭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며 처참하게 처발렸다.(ㅇㅅㅁ, ㅈㅎㅅ, ㅅㄷㅅ, ㅂㄱㅌ ㅅㅂㄻ...)

 

도저히 건전무쌍하게 분노를 발산할 방도가 없었던 필자를 포함한 갤러(커뮤니티에서 상주하는 잉여)들은 다함께 뻘글을 싸지르며 분노를 삭히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독수리를 응원하던 모 팀의 갤러로 추정되는 뻘글러가 나름대로 갤러리를 털기(게시판이 용도에 걸맞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도배 등을 하는 행위) 시작하였고, 그 내용은 실로 유치찬란하면서도 귀엽기 그지 없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그 갤러가 혹시 신촌 Y모 대학의 여자사람 새내기인 것이 아닐까, 하는 합당하면서도 논리적인 의심을 하였고 이 문제에 대해 놀라운 방법으로 증명을 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적지 않는다.

 

 하여튼, 이 글의 본 목적인 "고려대의 호랑이와 연세대의 독수리는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라는 의문은, 해당 뻘글러를 추궁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도중 발견한 텍스트가 필자의 흥미를 끌면서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세대의 상징은 독수리인데, 이렇게 결정된 데에는 비화가 있다. 고려대학교의 상징인 호랑이에 대항할 상징 축생을 상정하는 안건이 연고전 직전의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의결되었는데, 원래는 호랑이와 라이벌인 사자가 가장 유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 중운위원이었던연세춘추 편집장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독수리는 호랑이를 잡아먹는다라는 말도 안되는 발언을 했는데, 총학생회장 이하 중운위원들이 모두 같이 마시고 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도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결국 그 날의 중운위에서는 연세대학교의 상징을 독수리로 정하고, 그 해 연고전에 쓸 응원곡으로 호랑이를 잡아먹는 독수리~란 노래까지 정했다.

 

문제는 다음 날 벌어졌다. 이 사실을 취한 채로 언론에 그대로 발표해서 진짜 동아일보에 연세대학교의 상징이 독수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가버린 것(...). 중운위원들은 나중에 술이 깬 상태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머리를 싸매다가, '호랑이는 하늘을 침범할 수 없고 그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라는 식으로 무마했다고.

 

전직 연세춘추 간부가 과거 내부 자료를 찾아보다 발굴한 사실이라고 한다. 물론 연대생들은 반신반의한다. 너무 말도 안되기 때문에.

 

출처http://www.angelhalowiki.com/r1/wiki.php/%EC%97%B0%EC%84%B8%EB%8C%80%ED%95%99%EA%B5%90#s-6.3

 

과연 이 텍스트가 사실일까. 정녕 80년대는 꿈과 희망, 그리고 술이 흐르며 낭만과 충격과 공포의 대학생활이 펼쳐지던 로스트 에이지였던 걸까. 혹시나 이것은 1960년 4월 18일, 평화로운 가두행진을 망쳐버린 이정재 사단의 습격에 분노한 고려대학교 선배들이 깡패들을 추적, 격멸하고 돌아와 다같이 막걸리를 나눠마시고 뻗어버려 다음날 정오에나 기상했기에 정작 4월 19일에 사상자가 없었다는 카더라 통신 같이 신빙성없는 이야기는 아닐까. 그리하여 필자는 정확하면서도 완전무결한 관련 조사와 그 기록을 남길 필요성 및 의무감마저 느껴버린 것이었다. (절대로 중간고사 공부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일단 고려대학교의 상징인 호랑이의 기원은 제법 명확하다. 1983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고려대학교의 호랑이 상징은 1933년 현재 본관건물을 신축하면서 입구에 호랑이머리의 문양을 새겨넣으면서 시작되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또한 동 기사에서 1958년 당시 유진오 총장이 호랑이를 정식으로 학교 동물로 지정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동아일보, 83년 4월 12일자, p.8, "大學스포츠는 百獸의 祭典") 참고로, 고려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에는 1933년의 본관 건설 시 문양은 언급하고 있으되, 유진오 전 총장의 제정은 명확한 시점과 인물까지 그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렇다면 연세대의 상징에 대한 위 텍스트의 내용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연세대학교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한 결과, 연세대학교의 독수리 상은 학우의 기금을 모아 1970년 5월 9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즉 위, 엔하위키에서 발췌한 텍스트의 80년대 설은 최소한 그 제정 시기에 있어서는 이미 그 신빙성이 소거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연세대학교의 상징으로서 독수리가 정해진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확하다. 심지어 연세대학교의 공식홈페이지나 동문회의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보아도 이렇다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단지 성경의 제40장 제31절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을 뿐이다. 이 구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이사야서 40장 31절)”은 1970년 제막된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독수리상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세대의 독수리는 언제부터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일단 연세대의 상징으로서 독수리를 언급한 것 중 필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1963년의 것이다.(연세춘추, 63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63년 5월 30일자, p.5, "大學新們街"에서 재인용 함.) 그러나 1970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연세대와 독수리의 인연이 '십수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동아일보, 70년 5월 15일자, p.5, "延世大 독수리像")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독수리가, 기사의 문맥과 작성 시점을 고려하여 볼때 심볼로서의 독수리가 아닌 캠퍼스에 설치된 독수리상일 가능성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연세대와 독수리의 인연은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연세대학교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1956년 12월 27일 합병함으로서 탄생하였다. 즉, 연세대학교의 통합 상징물로서 독수리를 꼽아보자면 1957년 초부터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이전, 연희전문과 연희대학교, 그리고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상징물 중 독수리가 존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자료를 얻지 못하였다.그리하여 필자는 지금부터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탄생한 1957년 초에서 1963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연세대학교의 상징으로서 독수리가 자리매김하였으리라는 가설 하에 이를 추적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앞서 언급했던 엔하위키의 텍스트가 일말의 실마리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조사를 하기로 했다. 엔하위키의 텍스트를 분석하면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시점 - 1980년대

 2. 행위자 - 연세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 및 그 소속이던 연세춘추 편집국장.

 3. 행위 - 학생들이 술을 왕창 퍼마시고(...) 학교의 상징 동물을 제정하다.

 

이 중 1은 앞서 이미 그 신뢰성이 없음이 증명되었으므로 논외로 하며, 굳이 필요하다면 1957년부터 1963년 사이의 기간으로 수정해 고려하도록 한다. 문제가 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하겠는데, 첫째로 당시에 연세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실제로 학교의 상징 동물을 제정할 권한이 있었는가, 그리고 둘째로 연세춘추 편집국장이 당시 중앙운영위원회의 위원 혹은 발언권을 가지는 출석자였는가.

 

안타깝게도, 1957년 당시에 연세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가 존재하였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는 없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이 설치하였던 학도호국단이 1960년 4월 19일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짐과 함께 동년 5월, 대통령령으로 해체되고 대신하여 "학생회"가 창설되었으나 1975년 5월, 다시 학도호국단이 부활하면서 그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자료가 남지 않은 것이다. 현행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학생회칙 제정 자체는 1988년이므로,  이것을 통해 1957년부터 1963년 사이의 정황을 역추적, 유추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한가지 힌트가 있다면, 1958년 고려대학교 유진오 총장이 호랑이를 고려대학교의 상징으로 공표하였다는 점. 위 텍스트의 서사구조를 인용하자면, 연세대의 여러모로 존경할만한 선배들은 호랑이에 대응할만한 축생을 물색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시기는 1958년 유진오 총장의 공표 이후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겠다. 

 

이때 학도호국단, 특히 대학의 그것은 각자 "학도호국단 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활동을 수행할 여지를 보장받았으므로 연구의 범주에 포함시킨다고 한다면 바로 이 시기, 1958년부터 63년 사이의 연세대학교 학도호국단 중앙위원회, 혹은 학생회 중앙위원회의 구성을 탐구하는 것이 이 난제의 실마리를 푸는 것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자는 아직 남은 시험이 두개나 있는 관계로 여기 이 시점에서 추적을 일시 중단해야하겠다. 그러나 먼 훗날, 뜻있는 나의 후배가 이 글을 발견하여 나의 유지를 이어받아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나서준다면 더이상 바랄 것은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에피소드가 사실이라면, 그로서 우리는 낭만적이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하나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개드립] 김치전 소설 작업실

교양과목에 조별과제로 제출할 글입니다. 고려가전의 특징을 살려 글을 써보라는 과제였습지요. 끌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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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전

 

김치는 한식(韓食)국의 사람이다. 그의 가계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문의 개조(開祖)이자 김치의 43대조 ‘저’는 신라의 학자로 한 겨울에도 사람들이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저는 아들 저림을 낳았고 그 아들은 짐채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종묘사직과 만백성의 밥상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벼슬을 하였는데 대대로 그 처분이 공명정대하고 자상하여 만인의 은은한 사랑을 받아왔다.

김치는 본디 장독대 지방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부친은 배추요, 모는 염 지방에서 온 소금이다. 그의 이름은 본디 백(白)이었는데, 임진년 왜란 이후에 서역에서 온 고추를 본처로 얻으며 비로소 이름을 김치로 바꾸었다. 본처를 얻기 전부터 고을에서 미녀로 이름 높던 저(菹 젓갈)씨 처녀를 양첩으로 얻어 지냈으며, 또한 고장의 똑똑한 고아를 양자로 들여 장자로 삼았는데 그 이름을 동치미로 하였다. 동치미는 임진년 왜란이 끝난 후 당도한 근(根) 가문의 장녀 감서(甘薯 고구마)를 처로 얻었다. 김치는 그뿐만 아니라 평소 그를 흠모하여 자주 집에 들락거리던 산(蒜 마늘), 생강, 파 등의 처자를 첩으로 거두었다.

김치는 평소 심신수양을 좋아하여, 장독대 지방에서 함부로 세상에 나가지 않고 차분히 스스로의 덕을 갈고 닦아 그 위명이 절친한 친구인 장(醬)씨 가문의 도(醏 된장), 윤(膶 간장) 형제와 함께 근처에 자자하였다. 세인은 그에 대해 “장독에 들어앉아 우로는 처(고추)를 앉히고 좌로는 첩(젓갈, 마늘, 파, 생강)들을 앉혀 차분히 스스로를 다스리니 비로소 깨달아 위로는 아득히 생을 맛보았고(미생물味生沕) 이로 말미암아 부모님께 효를 발한다.(발효發孝)”라고 말하여 칭송하였다. 이처럼 김치의 성격은 실로 호방하면서도 담백 침착하여 일찍이 나라 사람들이 그와 같이 밥상에 앉기를 한결같이 바랐다.

이때 나라를 다스리던 국왕은 맥반(麥飯 보리밥)이었다. 상(上, 국왕)이 김치의 이름을 듣고 백관을 둘러보며 말하시길, “평소 장독대 지방의 김치가 그 성미가 실로 호방하면서도 시원하다고 들었는데, 이제 내가 그를 불러 곁에 앉혀 혀끝의 까끌까끌한 맛을 씻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교지를 내려 김치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에 김치는 한걸음에 달려 국왕이 거하는 서울 반상(盤床)궁에 당도하여 계단 아래에 꿇어 앉아 국왕의 교지를 받들었다. 이후 그는 국왕의 식사시간에 옆에 앉아 심심치 않게 즐거이 해주었으며, 이로서 총애를 얻어 가끔 국왕이 밤늦게 국생, 두부 등과 함께 불러내어 술동무로 삼곤 하였다. 또한 그는 나라의 식량을 관장하는 반찬(班讚)의 직위를 얻어 동료 백미(白米)와 함께 백성들의 밥상이 풍성하도록 많은 신경을 썼으며 무예와 군략에도 능하여 자주 북부의 면역(免疫) 지방의 토포사(討捕使 토벌사령관)로 주상이 내리는 상방검(尙方劍)을 받잡고 나아가 균(菌)족 오랑캐들을 토벌하는데 공을 크게 세웠다.

또한 김치는 높은 관직과 왕의 총애에도 개의치 않고 백성들과 어울리길 마다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겨울에 싱싱한 채소를 먹지 못함에 가슴 아파하여 저장고를 만들어 그로서 백성들에게 겨울에도 채소를 먹였다. 때문에 그는 드물게도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의 사랑을 고루 얻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때로 그의 호방하면서도 불같은 성격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고, 그때마다 서울에 와서 김치와 친하게 된 정강(井江 우물과 강)이 이들을 달래주었으니, 김치가 뒤에 홀로 탄식하며 후회하기를 수백 번이었다.

이렇듯 김치는 성격이 담백하면서도 호방하였다. 이에 나라가 항구를 열어 왜인(倭人)이나 양이(洋夷)들의 교역을 허하였는데, 맥반의 세자로서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백반(白飯)은 김치에게 이들을 접대하는 임무를 주어 항구로 보냈다. 이때 관청에서 홀로 숙식하는 그를 걱정하여 집에서 옷을 가져온 그의 첩 산(마늘)이 뿌린 향수의 냄새를 양이와 왜인들이 비웃자 칼을 뽑아 휘두르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에 왜인과 양이들이 그의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혀를 내두르며 쩔쩔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국왕은 그를 다시 서울로 불러들여 근신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김치는 국왕의 앞에 기어 나아가 부복하며 “신이 장독대 지방에서 스스로를 갈고 닦다가 비로소 선왕 전하의 영을 받들어, 수련이 부족함에도 서울로 올라와 감히 망령되이 관직을 받잡은 지 어언 30년이옵니다. 그간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여 신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 아이가 수백이요, 정강이 이들을 달래기를 수천 번이었사옵니다. 이제 신이 제 미천한 성미를 버리지 못하고 나라 일을 그르친 죄를 씻을 길이 없사오니 부디 주상께서는 신의 죄를 물어 관직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청하였다. 이에 국왕은 눈물을 흘리며 단 아래로 내려와 김치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길 “선왕께옵서 경을 청하여 서울로 불러들이고 상머리에 앉아 과인으로 하여 셋이서 아침식사를 들던 것이 수천 번이요, 밤에 국생과 두부, 돈증(豚蒸 삶은 돼지고기) 등과 함께 술을 들기를 또한 수천 번이오. 그대가 곁에 앉아 세상의 느끼하고 더러운 맛을 호방한 언행으로 시원하게 씻어주었는데 이제 그대가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밥상에서 수저를 들고 또한 누구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겠소. 부디 떠나겠다는 말을 취소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옛 글에 이르기를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깨달아 물러남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사오니 바라옵건대 상께서는 소인을 세간의 웃음거리로 삼지 말아주소서.”라고 말하며 재차 물러남을 청하니 비로소 국왕이 눈물을 흘리며 지팡이와 가마를 내려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윤허하였다.

이때 왜국의 단무지는 평소 김치의 이름이 아름다움을 듣고 시기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김치가 낙향하여 고향에서 조촐히 사숙(私塾)을 열어 준재를 가르친다는 소리를 듣고 이에 찾아와 김치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치졸하면서도 비열한 성미를 버릴 수 없는지라, 이윽고 김치의 버릇을 그대로 익혀 왜국으로 건너가 스스로를 기무치라 칭하였다. 김치는 외국에도 그 이름이 호방하면서도 학식이 높기로 이름이 높은지라, 양이와 왜인들도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수두룩하였는데, 단무지가 이름을 바꿔 기무치라 스스로를 일컫자 그가 김치인 양 착각하게 되었다. 이에 단무지는 연일 강연을 열어 항구에 들어온 양이들과 왜국 각지에서 몰려든 왜인들에게 강연하였으나 그 얕은 학식과 치졸한 성미가 금세 들통 나게 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자가 단무지가 아니라 김치라고 알고 있었으니 김치의 높은 이름에 누가 드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국에서 김치가 그 얕은 학식과 치졸한 성미로 만인의 욕을 먹고 있다는 소문이 드디어 서울에도 흘러들어오니, 국왕이 당황하여 만조백관을 돌아보며 이에 대해 물었다. 이에 양인 출신으로서 조정에 출사한 언관(言官) ‘뉴스’가 꿇어앉아 고하기를, “신이 듣기로 왜국에 김치가 건너가 드디어 그 치졸한 성미와 학식을 드러내어 나라와 조정에 누를 끼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신이 알기로, 김치는 고향으로 내려간 이래로 함부로 밖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사숙을 열어 준재들을 기르고 있사온데 이는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당황하지 마시옵고 신 등이 소식을 알아올 때 까지 기다려주시옵소서.”라고 말하고는 주상의 윤허를 얻어 부하인 기자와 피디 등을 데리고 그대로 궁을 나서 배를 잡아타고 왜국으로 건너갔다. 이윽고 뉴스는 왜국의 김치는 실은 김치 선생이 아니라 기무치였음을 알아차리고는 그대로 서신을 띄워 조정에 고하였다. 이에 국왕은 불같이 분노하여 외무를 담당하는 기관인 예조(禮曹)에 대응책을 준비하라 이르고는 편지를 띄워 김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김치는 둘째 아들 홍저(紅菹 깍두기)를 대신 서울로 보내 드디어는 기무치의 사칭을 만국에 널리 알렸으니 이로서 기무치와 왜국이 만인의 비웃음을 받아 그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으며 김치의 이름과 품성이 온 천하에 널리 퍼졌다.

이때 천하에는 사스(SARS)라는 고약한 도적집단이 깃발을 널리 세워 발흥하고 있었는데 그 위세가 옛 한나라의 황건적, 원나라의 홍건적에 못지않았다. 사스가 만국을 휩쓸며 드디어 한식국의 북쪽, 면역 지방에 당도하였다는 파발이 들어오자 국왕이 당황하여 문무백관을 돌아보며 대책을 물었다. 이에 언관 뉴스와 성균관 학사 공석(工石 공돌)이 고하기를, “신들이 생각하기로 이들을 막을 자는 면역 지방의 싸움에 능한 자가 제일일 것인데, 지금은 낙향한 김치가 바로 그 고장에서의 싸움에는 천하 으뜸이었고, 김치의 첩인 산(마늘)이 또한 군략에 능하다고 하오니 이들을 불러 도적의 침입을 막으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국왕은 이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교지를 내려 김치와 산을 불러왔으니, 김치가 다시 노구를 이끌고 계단 아래에 꿇어앉아 국왕이 내리는 상방검과 두정갑옷을 받아 갖춰 입었다. 이윽고 그가 도원수 겸 도순변사의 직위를 받아 산과 함께 서울에 주둔 중이던 경군(京軍) 일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되, 계속해서 모병하여 면역 지방에 당도하여서는 그 군세가 삼 만에 이르렀다. 이윽고 김치가 면역 지방의 백혈위(白血衛 백혈구 + 조선시대 군사단위인 ‘위’)의 군사 일만을 합쳐 사스를 토벌하는 싸움에 나섰으니, 그 싸움의 장렬함이 하늘을 뒤흔들고 도적들의 피가 들에 흐르기를 마치 강물처럼 하였다.

김치와 산이 군사를 이끌고 적들의 수급을 거두어 위풍당당하게 서울로 개선하니 국왕이 북문의 밖에서 기다리다 몸소 이들을 맞이하였다. 국왕은 이들을 치하하며 김치의 품계를 종일품 숭록대부에서 단번에 두 단계를 올려 정일품 특진보국숭록대부로 정하고, 산에게 정경부인의 칭호를 내렸다. 또한 둘에게 많은 식읍과 곡식을 상으로 내리려 하였으나 김치는 이를 물리치고는 조용히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김치는 말년에는 새로이 개척한 냉장고 지방으로 가문을 옮겨 살았으며, 거기에서 다시 많은 자손을 보았으니 평원 지방의 소맥(小麥 밀)과의 사이에서 전을, 정강의 딸인 수낭(水娘)과의 사이에서 지쾌(知快 찌개의 이름 변형)를, 식유(食油 식용유)와의 사이에서 초반(炒飯 볶음밥)을 얻었는데 각각 그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단정하며 성품 또한 온화하여 만인의 사랑을 널리 받았다. 또한 장자인 동치미와 둘째아들인 홍저 등도 그 이름을 널리 떨치니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김치는 본디 차분히 스스로를 갈고 닦아 수행을 좋아하는 성미였는데 국왕의 부름을 받아 출사한 이래로 위로는 국왕의 옆에 앉아 느끼하고 더러운 맛을 씻어버리도록 간하였고 아래로는 만인의 밥상을 풍성히 하고, 균 오랑캐와 도적의 침범을 막아낸 공이 있다.

그의 성미는 때로는 불과 같아 그를 처음 접한 아이들이 무수히도 울음을 터트렸으며 이것이 지나쳐 훗날 나라에서 윤허한 교역을 망칠 뻔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분수를 잘 알아 물러나 더 이상 이름을 더럽히지 않았고, 왜인 기무치의 사칭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를 침착히 해결해 오히려 나라의 이름을 드높였다.

그는 밖으로는 북쪽의 오랑캐와 도적 때를 일거에 격파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밥상을 풍족하게 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백성들이 채소를 마음껏 먹게하여 이들의 혈색을 돌게 하였다. 또한 많은 처첩을 잘 다스리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식들을 세상에 내보내 세인들이 동치미, 홍저, 전, 지쾌, 초반 등의 자식들과 어울려 이들이 사랑받게 만들었으니 비로소 스스로를 갈고닦아 집안을 단속하였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천하를 편하게 만들었다(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평을 얻기에 충분하였다.


천안함 이스라엘 잠수함 떡밥을 막 접하고 생각난 글 귀절. 잡담

 

[(전략) 그러나 이는 전혀 색다른 유형의 인간을 창조해낸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연구자는 필시 정복감과 자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식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정당한 것이다. (...) 전문가는 자신이 연구하는 우주의 극히 미세한 한 분야는 잘 '알지만' 나머지 분야는 전혀 모른다. (...) 이전에는 인간을 그저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다소 유식한 자와 다소 무식한 자로 단순하게 분류했지만, 전문가는 그 두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문 영역과 무관한 것은 모르기 때문에 유식한 자도 아니고, '과학자'로서 미세한 전공 분야는 매우 잘 알기 때문에 무식한 자도 아니다. 우리는 그를 무식한 식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는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모르는 모든 분야에 대해 무식한 자로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처럼 유식한 자의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전문가의 행실이다. 그는 정치와 예술, 사회 관습, 그리고 다른 분야의 학문에 대해 원시적인 입장과 무지한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만만하게도 해당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후략)]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황보영조 역, 서울 : 역사비평사, 2011, pp.152~154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이새끼들아. 모르는 분야면 전문가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고.


흔한 대조. 잡담

아프간 주둔 미군 : 도보정찰을 다녀오니 2주 전에 지어놓았던 막사가 폭발해있었어요 우와아아아앙!

오늘의 나 : 학교에서 잉여하고 돌아오니 2주 전에 만들고 처박아 두었던 막사가 폭발해 있었어요 우와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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